맛밤과 역류성 식도염
며칠 전 진료가 끝난 후, 홈페이지 작업을 하기 위해 한의원에 남았다.
저녁 먹으러 나가기는 귀찮고, 그냥 굶기에는 배가 고프다. 등산 갈 때를 대비해 챙겨두었던 맛밤 생각이 났다. (토요일 진료 마치고 관악산에 오르는 경우가 많아 원내에 간식을 준비해둔다) 작업하면서 먹을 수 있기 때문에 시간도 절약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다.
요즘 맛밤을 즐겨 먹는다. 등산하면서 식사 겸 간식으로 자주 가져간다. 단백질 열풍을 타고 프로틴-바라고 이름 세탁한 초코-바보다 훨씬 든든하다. 초코-바는 먹고 움직이면 금방 꺼지지만, 맛밤은 보통 2~3봉지 정도 가져가서 중간중간 먹어두면 산행이 끝날 때까지 걱정없다.
이 날 저녁 맛밤 4봉지를 먹어치웠다. 너무 많이 먹는 것은 아닌가 살짝 불안하긴 했지만 괜찮겠지 하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30분 정도 시간이 지나자 명치가 묵직하게 막히기 시작했다. 머리에 땀이 나기 시작한다.
맛밤 먹고 체하다
가슴이 답답하고 위쪽으로 열이 뜨면서 머리에 땀이 줄줄 나기 시작한다.
입으로 신물이 넘어오고 입 안에 침(담음, 痰飮)이 계속 생겼다. 구역감이 들면서 토할 것 같은 느낌도 있었지만 토하진 않았다.
급성 체증으로 인한 전형적인 역류성 식도염 증상이었다.
평진환(소화제)를 40여환 삼키고 에어컨을 틀었다.
그런데 왜 체했을까?
좀 빨리 먹긴 했다. 10~20분 동안 4봉지를 먹었다. 등산할 때처럼 움직이는 상태도 아니었으니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은가? 맛밤 60g짜리 4봉지이니 240g을 먹었다. 보통의 밥 한 공기가 200~250g 정도이니, 평소 밥 한 공기씩 먹는 사람에게 맛밤의 양이 그리 많은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반찬도 먹지 않고 맛밤만 먹었다. 그럼에도 체했다. 그 이유는 맛밤의 고유한 특성 때문이다.
맛밤, 한약재로 보면 건율이다
맛밤의 바탕이 되는 밤은 한약재로 보면 건율(乾栗), 즉 말린 밤에 해당한다. 물론 맛밤은 촉촉하니 수분이 있는 밤이고, 한의원에서 쓰는 건율은 건조시켜 좀 더 단단한 상태라는 것이 다르다는 점이 약간 차이 나지만, 밤의 성질에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다.
- 건율(乾栗) — 태음인 약재. 성질은 열이 많거나 차지 않은 평범(平)한 성질이며 맛은 달다. 단단한 상태의 습(濕)한 성질의 약재이다.
쉽게 말해 건율은 밥처럼 속을 든든하게 채우는 음식이다. 군밤이나 찐밤을 먹으면 포만감이 오래가고, 기운이 보충되는 느낌이 드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또한 위장의 기운이 약해 밑으로 축 쳐져 있으면서 설사를 계속 하는 이에게 좋은 약재이기도 하다. 물론 태음인 약재이기 때문에 태음인 중 위장이 차고 기력이 약한 사람에게 잘 맞는다.
음식이 체질에는 맞지만, 성질이 안 맞으면
난 태음인이다. 그리고 평소 맥을 보면 몸이 찬 편이다. 기력이 약하지는 않지만 아주 강하지도 않다. 평소 맛밤을 즐겨 먹는 이유도 태음인 음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체했을까?
맛밤의 고유한 성질인 기운을 단단히 모으고 올려주는 효과 때문이다. 이것을 느낄 수 있는 것이 먹은 후 포만감이다. 밤은 밑으로 처지는 기운을 단단하게 모아주며 위로 살짝 올려준다. 갑작스럽게 많은 양의 밤을 먹다 보니 기운이 소화기에 단단하게 모여 풀어지지 않았다. 즉, 기운을 모아주지만 잘 안내려가며 포만감이 든다는 뜻이니 과하게 먹는다면 바로 체증이 된다.
진료실에서 많은 환자들에게 체질에 맞는 음식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내 체질에 맞는 음식이더라도, 이렇게 음식이 가진 성질이 당시 내 몸 상태와 맞지 않으면 바로 병이 생길 수도 있다. 이런 경우까지 헤아리는 단계를 '체질식 레벨 2'라고 지칭한다. 참고로 '체질식 레벨1'은 일단 체질에 맞는 음식 위주로 먹는 단계이다.
음식도 약이 되려면 조건이 맞아야 한다
약식동원(藥食同源), 즉 약과 음식은 뿌리가 같다.
우리가 흔히 먹는 생강, 대추, 다래, 앵두, 계피, 심지어는 쌀도 한약이다. 한약은 우리가 먹는 음식이고, 자연이다.
체질을 안다는 것은 단순히 "나는 무슨 체질"을 외우는 일이 아니다. 그 '체질 음식' 안에서 어떤 음식이 내 몸 상태에 맞고 어떤 음식이 안 맞는지 알아야 한다. 간식으로 흔히 먹는 맛밤이었지만, 반응은 분명했다. 내 체질에 맞는 음식이더라도 조건이 안 맞으면 체증을 만들 수 있다.
집에서 마신 위스키
소화제를 먹고 일을 마치고 늦게 집에 돌아왔는데 체기가 아직 다 풀리지 않았다. 위스키를 스트레이트로 조금씩 머금으면서 마셨다. 입에 조금 머금고 삼키자 향(香)이 쭉 퍼져나간다. 10분에 걸쳐 2잔 정도 먹자 속이 진정되며 구역감이 없어져 씻고 잠을 청할 수 있었다. 체기를 위스키의 강한 양기와 향이 푼 것이다.
이 대목은 조심해서 읽어야 한다. 내 몸 상태에 맞기 때문에 위스키가 소화제였지만, 열이 많은 양인(소양인, 태양인)이 마셨다면 열이 위로 더 올라가고 역류성 식도염 증상이 심해지며 토했을 수도 있다.
즉, 모든 음식은 상대적이다. 내 몸에 맞으면 약(藥), 내 몸에 안 맞으면 독(毒)이다.
역류성 식도염을 치료하는데 있어서 신물이 넘어오고 구역감이 올라오는 증상만 억제하면 안 된다. 중요한 것은 왜 위산이 역류했는지다. 체질마다 사람마다 그 원인이 다르기 때문에 반복적인 증상을 일으키는 원인을 파악하여 차단 이후에 치료에 나서야 악순환을 끊을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체질과 상태를 알고 있어야 한다.